박철효의 세상이야기 [제 2.357회]

군웅이 할거하던 난세의 시대를 살아간 세 군주! 
☞ 조조, 유비, 손권!

언제 누구에게 배신을 당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시대에 살아남아 각기 '한' 나라를 만들었다는 것만 봐도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각자 장단점이 있기에 우열을 가리기 힘들지만 굳이 서열을 매긴다면 어떻게 될까?

소설 <삼국지> 에서는 유비를 '한' 나라의 정통 후계자로 세우면서 가장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 에서는 조조를 높이친다. 
이유는 조조가 이뤄낸 성공이 피와 땀으로 하나씩 쟁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조조는 직접 자신이 전장을 누비며 싸움을 주도 했다. 어떤 때는 정면 승부로, 어떤 때는 계략과 외교로 말이다. 마상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다스릴 수는 없다는 말이 있는데, 조조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을 뿐 아니라 말에 내려와서도 천하를 잘 다스렸다.

조조는 위대한 전략가이면서 정치가, 행정가이고 시인이었다. 조조의 고향인 '안휘성' '박주'의 조조 기념관엔 밀랍으로 만든 세 개의 조조상이 있다.  각각 정치가 조조, 군인 조조, 시인 조조 상이다.

"정치가 조조"는 정세의 흐름을 재빨리 보고 그 변화에 맞춰 나라 시스템을 바꾸고 백성을 다스려 평화와 번영을 보장했다.

"군인 조조"는 정확한 판단과 앞선 전략, 지휘 능력으로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시인 조조"는 타고난 직관에 풍부한 시적인 능력을 갖추어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당시 삼국 중에서 조조가 세운 '위' 나라가 압도적 으로 강했고 종국엔 삼국을 통일한다. "위, 촉, 오"  세 나라가 중국을 삼분했다고 하지만 영토 비중을 보면 '위' 나라가 제일 많이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 14개주 중에서 '위'나라가 10개주, '오'나라 가 3개주, '촉' 나라가 1개주를 차지했다고 한다.

인구로 보면 '위' 나라가 약 65만 호에 440만명,
'오' 나라가 50만 호에 230만명,
'촉' 나라가 30만 호에 95만 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그렇다면 조조가 이런 강한 '위' 나라를 건설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조조의 장점☞기민한 판단력과 행동력.
조조의 장점은 비상한 통찰력과 때를 놓치지 않는 행동력에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유리한 고지를 유지해서 마지막 까지 앞서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조조는 동탁이 천자를 앞세우며 천하를 차지 할 꿈을 꾸자 자신과 지방의 제후, 영웅호걸들이 연합하여 동탁을 타도하려 하지만 실패를 맛보게 된다. 이때 조조는 실력을 더 키워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뛰어난 인재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세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때 조조는 비상한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시는 황건적의 난을 비롯한 연이은 전란으로 백성들이 땅을 잃고 마음 붙이고 살 데가 없었고 중국 천지에 유랑민들이 들끓게 된다.

‘이들에게 안심하고 살 터전을 만들어 주자!  백성들을 전란에서 구하고 천하를 태평하게 하면 나의 패업은 저절로 탄탄해 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백성들을 지켜주고 먹여 주어야 한다. 그걸 해결 할 방법은 없을까?
보통 싸움을 통해 성과 영토를 뺏을 생각만 할 때에 조조는 한 수 더 본 것이다. 이때 시행된 것이 둔전제와 병호제 시스템이다.

조조는 전란으로 버려진 논밭을 모두 거둬 들이고 백성들을 모아 농사를 짓게 했다. 농사를 지을 씨앗이나 농기구, 심지어 소까지 빌려주고 추수 땐 산출량의 6할을 받는 제도인데, 적지 않은 부담이었지만 열심히 일을 하면 먹고 살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유랑민들이 조조의 영내로 몰려들게 되자 식량은 증산되고 경제력은 날로 튼튼해져 갔다. 그 대신 세금을 매우 가볍게 해 주었다고 한다.

"병호제"는 병사를 일반 백성과 구별해 일정 지역에서 근무하면서 농사을 짓게 하는 제도로 아버지가 사망하면 아들이 그 뒤를 이었다. 도망가면 가족 전체가 벌을 받게 된다.

이 때문에 조조는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상비군을 유지하게 되고 비상 동원 체제도 갖추게 되었다. 조조가 전쟁에서 패해도 군사를 계속 보충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스템은 선순환 구조를 이루어 인구 증가,  경제력 증강, 국방 강화로 연결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거 아닌거 같지만 그 당시 전란 틈에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놀라운 일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조조는 또 하나의 사업을 벌인다. 바로 '한' 나라 천자를 자신의 근거지에 모신 것이다.

당시 '한' 나라 황제는 동탁에게 얹혀 있다가 동탁이 죽고 나서는 유랑생활을 하는 처지였다.  동탁에 의해 '장안' 까지 끌려갔다가 낙양으로 돌아왔으나 누구 하나 받드는 사람이 없었다.

조정이란 것도 허울 좋은 이름뿐 이었다. 이때 천자를 모셔와 천하에 명분을 세우자는 건의가 올라온다. 천자를 모시면 우선 번거롭고 또 천하의 시샘을 받을 우려가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당시 조조보다 훨씬 강했던 원소 진영에서도 천자를 모시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원소가 결단을 못 내려 그냥 넘어간 바 있었다. 조조로선 강적 원소의 심기도 건드려선 안 되었던 것이다.

이때 조조의 핵심 모사인 순욱과 곽가가 천자를 꼭 모셔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고 한다. “장군께서 정의로운 군대를 일으켰으니 이치를 봐서도 천자를 모셔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바람과 하늘의 도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결단력이 빠른 조조는 최종 결심을 하고 천자를 모시기로 결정을 한다. 천자와 조정에서도 환영을 하여 조조에게 대장군이라는 큰 벼슬이 내려졌다.

이때 원소에게 태위 벼슬을 내리는데 조조보다 낮다고 받지 않자 조조는 두말 않고 대장군을 양보한다. 명분보다 실질을 항상 중시했던 것이다.

조조가 근거지인 허창에 천자를 모신 후 모든 명령이 조정과 천자의 이름으로 나가게 되었고, 조조가 곧 조정이 되어 다른 제후들을 호령하게 된다. 또 천자의 권위를 매우 편리하게 사용한다.

비록 천자가 실권은 없었지만 그 이름이 갖는 상징적인 가치를 재빨리 간파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조는 기민한 판단력과 행동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조조편1~2/전대호(孫武, BC545~470)발췌]

조조의 경영자적 좋은 마인드를 받아들이는 지혜로운 수요일이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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