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에 대한 무지를 경계하라 -

🐾 손자병법/11부(1/2) [제 2.161회] 🐾

- 자신에 대한 무지를 경계하라 -

"미국의 허 찌른 북베트남 뗏공세!
월남전 판세를 바꾸다."

“미국이 1964년에 승리했다.”
이게 무슨 망발(妄發)인가?
미 정부가 69년 베트남 전쟁의 승패에 대해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했는데, 이미 5년 전에 미국이 북베트남을 이겼다는 결과가 나왔다니! 

베트남 전쟁을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의 시각으로 예리하게 분석한 미국의 군사학자 해리 서머스 대령의 저서 『전략(On Strategy: A Critical Analysis of the Vietnam War, 1982)』을 보면 아주 흥미로운 얘기가 나온다. 

69년 닉슨 행정부가 들어선 후에 전쟁 수행과 관련된 미국과 북베트남의 모든 자료, 즉 인구와 국민총생산(GNP), 병력 규모 그리고 함정과 전투기 대수 등을 국방부 컴퓨터에 넣고 “언제쯤이면 미국이 승리 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던 것이다. 

물질적인 역량으로 봐선 당연히 5년 전에 미국이 이겼어야만 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그 후로도 전쟁은 계속되었고 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북베트남군에 의해 함락됨으로써 비로소 전쟁은 끝났다. 

최첨단 현대무기로 무장한 세계 최강의 미국을 상대로 물질적 역량으로는 비교 할 수 없는 북베트남이 이긴 것이다. 

여기서 미국이 간과한 게 있다. 컴퓨터가 측정 할 수 없는 ‘국민의 전투 의지’를 놓친 것이다. 의미 있는 지적이다. 

이 대목에서 짚고 가야 할 부분이 또 있다.
당시 미 국방장관인 맥나마라는 컴퓨터에 넣을 데이터를 잘못 선정했다. 

그는 케네디 대통령에게 발탁되기 전에 세계 굴지의 포드자동차 사장 이었다. 그는 ‘인간 제록스’라고 불릴 정도의 비상한 기억력을 가졌지만 숫자를 지나치게 의식한 ‘숫자맨(numbers man)’ 이었다. 

그래서 전투력도 계량화 해 숫자로 계산 할 수 있다는 과오를 범했다. 과연 숫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인가?

67년 11월까지 약 50만 명의 미군이 베트남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미국 내에서는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반전 여론이 높아지고 있었다. 

영화배우 제인 폰다는 적극적으로 반전 운동을 펼쳐 ‘하노이 제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미 정부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는 헛된 믿음을 홍보하고 있었다. 

"존슨 대통령, 북베트남에 평화협상 제의"
바로 이 즈음, 20여 년 전 프랑스군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배시켜 물러가게 했던 보 구우옌 지압(Vo Nguyen Giap·武元甲) 장군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대담한 작전을 구상한다. 바로 뗏(Tet) 공세, 즉 구정공세(舊正攻勢)였다. 

그는 67년 가을부터 남베트남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민중 봉기를 유발시켜 일거에 남베트남 정부를 무너뜨리고 미군을 물러가게 한 다음에 베트남을 통일한다는 전략을 실천했다. 

보 구우옌 지압은 67년 9월, 북위 19도선 비무장지대 근처인 콘 티엔에 주둔하는 미 해병 제3사단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어 캄보디아 국경지역과 케 산 등 여러 지역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총공세는 68년 베트남의 음력 설인 1월 30일을 전후로 한 연휴 기간을 노렸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설 전날인 1월 29일에는 귀성 인파로 베트남 전역이 극도의 혼잡을 이뤘다. 

이때 남베트남의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은 1월 29일 오후 6시부터 1월 31일 오전 6시까지 36시간 동안 일방적인 구정 휴전을 선포했다. 

북베트남군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남베트남 군인 복장으로 대담하게 미군 트럭을 세워 사이공으로 들어가는가 하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사이공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무기와 탄약은 아이들이 미는 채소 수레 속이나 가짜 장례식을 꾸며 관 속에 넣어 운반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북베트남 군인과 베트콩 7만여 명이 사이공과 주변 지역으로 침투하는데 성공했다. 1월 30일 새벽 1시30분, 새해를 축하하는 폭죽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가운데 대통령궁이 습격당했다. 

사이공에서는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붙잡힌 베트콩을 치안국장 구엔 곡 로안 장군이 거리에서 북베트남 군인을 즉결 처분하는 유명한 장면은 외신기자에게 사진으로 찍혀 이듬해 퓰리처상을 수상하게 했다.

미국대사관은 새벽 2시47분에 피격을 당했다. 이때 미국대사관을 둘러싸고 벌어진 6시간의 교전 상황은 여과 없이 방송으로 중계됐다. 

이날의 전투는 사이공시 뿐만이 아니라 36개의 주요 도시와 100여 곳의 마을, 25개소의 군사시설에도 동시에 벌어졌다.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이들을 맞아 2~3일 동안 치열하게 싸웠고 완전히 소탕 할 때 까지 한 달이 걸렸다. 

미국 시민들은 그들의 정부가 지금까지 자신들을 속여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반전 여론은 극에 달했다. 

마침내 존슨 대통령은 3월 31일 대국민 성명 발표를 통해 대선에 재출마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고 북베트남에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그리고 나흘 뒤인 4월 3일, 북베트남 정부는 미국의 제의를 수락했다. 

북베트남은 구정공세에서 물리적으로는 패배했지만 정신적·심리적·정치적으로는 승리했다. 

베트남 전쟁은 근본적으로 북베트남인의 눈으로 볼 때 외국 세력에 의한 식민지 지배의 배제를 목적으로 한 민족해방전쟁이었다. 

동시에 계급투쟁으로서의 인민전쟁(人民戰爭)이었다. 그래서 공산주의 전략을 이해하지 못하는 서방 측에선 납득이 가지 않는 미묘한 전쟁이었다. 

인민전쟁은 ‘지지 않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한 것처럼 미국은 최첨단 군사력을 갖고도 전술적으로만 승리했을 뿐 전략적으로는 패배했던 것이다. 

패전 후 맥나마라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11가지 교훈을 뽑았다. 그중 주목 할 만한 것이 있다. 

‘베트남의 역사, 문화, 인민, 정치, 지도자들의 인간적 요소 등에 대해서 미국의 정책 수립자들은 무지했다.’ ‘미국적인 과학·지식과 미국적인 물질의 힘을 과신했다.’ 

여기서 잘 보면 두 가지의 ‘무지’를 알 수 있다. 상대방에 대한 무지와 자신에 대한 무지다. 우리가 손자병법을 생각하면 대체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어구가 ‘적과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는 명구다. 

모공(謀攻) 제3편에 나온다. 주의 할 부분은 ‘백 번 싸워 백 번 다 이긴다’는 ‘백전백승’(百戰百勝)이나, 백 번 싸워도 지지 않는다고 하는 ‘백전불패’(百戰不敗)가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적과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위태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손자가 말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리더들이여!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너 자신부터 똑바로 알라! 

베트남의 구정공세를 생각하면서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환절기에 건강유의 하시고, 오늘도 나 자신부터 잘 알고 상대를 만나는 지혜로운 수요일이 되시길 응원합니다.

사단법인)독도사랑회
사무총장/박철효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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