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서른중반


[(부산)조은뉴스=이재훈 기자]  자녀를 어린이집에 맡긴 부모들은 공통으로 교사의 책임감 있고 적극적인 보살핌과 교육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교사의 아동학대 사건으로 인해 보육교사 전체가 오해를 받거나 어린이집의 이미지가 실추되고 있다.

어린이집에 자녀를 보낸 학부모와 교육을 담당하는 보육교사의 입장에서 교육효과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은 쉽지 않다. 이에 부산시 민간어린이집 연합회에서 주최한 2013년도 교사 및 학부모 수기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은 작품을 기획으로 게재한다.

어린이집을 통해 올바르게 양육되고 있는 자녀를 바라보는 학부모와 열악한 교육환경속에서 올바른 교육관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보육교사의 실제 고백을 들어보자.


<내 나이 서른중반>, 정명하 보육교사

내 나이 서른 중반, 그때도 어려웠었다. 남편은 실직 중이었고, 어린이집을 운영 중이던 친구의 권유로 불과 일주일 만에 덜컥 계약을 끝냈다. 초콜릿 몇 봉지를 들고 아이들과의 첫 대면을 시작한 것으로 아무 준비 없이 현장에 뛰어들었었다. 자격증조차도 없이. 여러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경험하면서도 새삼 나를 재발견한 듯 ‘이 길이 나의 길인가?’를 문득문득 생각했었다. 갖은 서류며, 운영에 전반적인 그 모든 일들이 적당히 몸에 익어,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긴 안목으로 공부가 시작되었고, 그렇게 팔자에 늘 따라 나오던 교사가 되었다.

몇 해가 흐르고 창업하고자 성화부리는 남편을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어린이집을 양도하고 달달 긁어모아 새로운 일을 시도해 보았지만 신통치 않았으며, 그럭저럭 시간이 흘러 내 아이들에게만 집중할 수밖에 없는 시간들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나의 신념중 하나가 ‘아이에게 엄마는 세상 모두이다’인만큼, 일할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고, 지난 해 큰 아들의 대학교 입학식을 다녀와서야 비로소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물론 여유가 있었다면 작은 아이를 위해 ‘지금은 일 할 때가 아니다’라고 했겠지만, 큰아들의 서울 생활이 당장에 삶의 무게로,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제적 고통이 현실적이라면, 무능한 남편을 무심히 보려 무던히 애쓰면 애쓸수록 끓어오르는 분노로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운 시간들이 덮쳤다. 누군가는 늘 쉽게 조언한다. 요즘 세상에 이혼은 흉도 아니라고, 어디 내 흉 걱정인가? 훗날 내 아이에게 흉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오직 그 마음뿐이었다. 그가 내 눈에 보이지만 않아도 내가 살 것 같다는 생각을 누누이 하던 차였기에 이제 소개하려는 이 일은 마치 운명처럼 내게 왔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24시 야간보육교사!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아침이 오기를 갈망하며, 바스락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던 밤들의 연속이었다. 중3인 작은 아이를, 물론 아빠는 곁에 있었지만 엄마가 챙겨주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자책감과 이런 처지에 놓인 나 자신에 대한 비애로 인해 참으로 많은 생각들을 한 시간들이었다. 그때 오직 나만 바라보는 열 두 개의 눈동자는 동병상련의 아픔으로 느껴졌다. ‘그래, 이렇게 어린 아가들도 엄마 떨어져 일주일을 보내는데, 괜찮아! 이겨내자 아들아, 아가들아!’ 늘 가여운 마음이었으며, 어떻든 그 허기를 채워 주고 싶었다. 어느 때건 살며시 다가와 내 무릎위로 오든, 환한 미소로 달려와 품 안으로 오든, 온 마음으로 맞아주었으며, 칭찬 또한 아끼지 않았다. 과일이니 고기니 내 작은 성의에 감동하는 녀석들이 있었기에 나 또한 채워짐을 느꼈다. 여섯 명의 아이들 중 번갈아가며 감기, 구토, 설사 등 컨디션에 따라 칭얼거리기도 하였고, 밤새 열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무슨 까닭으로 그 새벽에 그렇게 두어 시간을 띵똥 그렸는지 아직도 알 수는 없지만, 다은이는 그 날 이 후부터 “내가 선생님 지켜줄 거야”라는 말을 적재적소에 한다. 계속 딩똥 거리는 소리에 “바람 때문 인가봐. 그렇지?” 라며 두려움을 내색 않고 아이들만 꼬옥 안고 있을 때, “선생님, 너무 무서워요.” “선생님도 무섭죠?” 라고 다은이가 물었고 “응, 무서워. 그래도 나가 봐야겠어.” 라고 했더니 “제가 따라가서 선생님 지킬 거예요.” 라며 손을 이끌었고, 불을 켜고 두런두런 하는 동안 홀린 듯이 딱 멎었다. 그 아침 여섯 명의 꼬마 탐정들을 이끌고 다양한 실험?까지 해대며 원인분석을 해 보았지만 딱히 ‘이게 범인 이었군’하는 것을 찾지 못했다. 그 후로도 술 취한 양반이 문에 기대있는 바람에 한 동안 덜커덩 거리는 문소리에 한 덩어리로 뭉쳐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오돌오돌 떨어대다가 이내 웃음보가 터진 밤도 있었고, 그렇게 우리는 한데 뭉쳐 강해졌고, 지금도 강해지고 있는 중이다.

언젠가부터 말문이 늦게 트인 효원이는 잠자리에 들 때쯤이면 내게 “엄마, 엄마”한다. 묘하게 가슴에서 들리는 듯, 뭉클한 경험을 했고, 나의 반기는 기색을 알아차린 녀석들이 여기저기서 “엄마”라고들 불러댔고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한번은 다은이가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는 “선생님이 진짜 우리 엄마 같다. 왠지” 순간 가슴이 미어진다고나 할까. “다은아, 선생님은 정말 기뻐. 이렇게 예쁘고 착한 딸이 생겨서” 라고 했다. 다은이는 엄마를 본 적도 없이 할머니와 사는 올해 여섯 살 아이다. 손녀에게 지극정성이신 할머님이 계시지만, 형편상 할머니도 일을 하시기에 월요일 날 등원해서 토요일에 귀가한다. 어쩌다 월요일 밤이면 내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어제요, 선생님 보고 싶어서요, 눈물이 날라했어요.” 물기 묻은 그 목소리는 아픔이고 감동이다.

중3병, 그 무섭다는 병을 혹독히 치르는 작은 아이와, 때로는 전쟁을 치르기도, 때로는 눈물바람을 뿌리기도 했다. 엄마의 부재에서 시작된 어긋남이 자유분방으로 변하면서 성적 또한 곤두박질쳤다. “그래, 엄마가 일 그만둘게. 널 위해서라면,”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그 애들은 어떻해?” “나 땜에 여섯 명이 아플 거잖아” 그 후로 많은 대화가 오갔다. 사진을 통해 다 꿰고 있는 여섯 아이들의 사연을 익히 알고 있을뿐더러 한 술 더 떠 과자며 장난감이며 심심찮게 “엄마, 이거 석이 주자.” “이 시계 두 개니까 쌍둥이 주면 좋아하겠죠?”라고 하던 아들이었기에 그렇게 극적으로 우리 모자는 ‘여섯 명의 천사’들에 이끌려 탈출구로 나올 수 있었다.

꿈 꾼대로 이루어짐을 느낄 때가 더러 있다. 고등학교를 진학하면 새벽밥을 먹듯 이른 등교 시간으로 인해 엄마의 손길이 꼭 필요할 것인데 아이들을 위해서도, 가정경제를 위해서도 일을 놓을 수 없었기에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로의 진학을 꿈꾸었고, 우리 모자는 그것을 이루었다. 물론 형의 전폭적인 24시간 밀착 과외 덕도 톡톡히 봤지만, 가슴에 사랑이 있고 무엇보다 넘치는 긍정의 힘이 에너지가 된 것 같다. 지난 여름방학 때도 카이스트 교수님들과 하루를 보내는가 하면, 학교에서 선발되어 일체 경비 부담 없이 중국여행도 다녀왔다. 또한 아이들 선물이라며 빠뜨리지 않고 로봇물고기를 사 들고 왔다. 자기 자리로 돌아와 꿈을 위해 노력하는 나의 멋진 아들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우리 작은 아들은 특히 석이를 좋아한다. 주말에 종종 소식을 묻곤 하며 가슴 아파할 때도 있고, “진짜 귀엽네요”를 연발할 때도 있다.


석이는 네 살배기로 우리아이들 중 가장 막내다. 엄마와 누나와 산다. 휴일을 보내고 오면 언제나 배실배실한 상태다. 머리를 감기고 목욕을 시켜도 가시지 않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뭘 먹었으며, 무슨 일로 어떻게 혼이 났다는 둥 미주알고주알 쫑알거린다. 행여나 상처될까 “엄마가 우리 석이 너무 귀여워서 그러셨나보다”라고 어루만지면, 때로는 수긍하기도 하고, 때로는 울먹이며 “아니예요”라고 할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또한 언제나 엄마와 누나를 기다린다. 아이의 말만 믿고 섣부른 판단을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아이가 ‘엄마가 나를 사랑해서 그랬구나’로 느껴지면 그나마 나을까 등도 생각해 본다. 물론 엄마와 여러 번 대화도 나눠 보고 아이와도 다양한 약속을 시도하면서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의젓한 형과 막무가내 떼쟁이 동생, 효진이와 효원이. 처음에는 적응하느라 한 동안 날밤을 새울 정도로 힘든 시간이 지나가고, 지금은 내게 장난을 걸 정도로 개구쟁이가 다 된 다섯 살 쌍둥이들이다. 형제도 없다. 선생님을 향한 사랑쟁취에 관한한 말이다.

여섯 중 제일 늦게 합류된 건우는, 지나칠 정도로 수줍음이 많고, 꽁꽁 닫힌 것처럼 소극적인 아이여서, 항상 눈을 맞춰가며, 식사시간이든 놀이시간이든 ‘선생님은 언제든 널 지지한단다.’를 인식시키며 접근했다. 차츰 시간이 흐르고 마음의 문이 열렸으며, 지금은 몰라볼 정도로 해맑은 아이가 되었으며, 오늘도 백만 불짜리 눈웃음으로 해피바이러스를 전해주는 ‘행복한 어린이집’ 5세 행복반 원아다. 덧붙여 너무나 생소한 일이기에 적어 본다. 지금까지 우리는 건우는 엄마와 단 둘이 사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터다. 그저께 수요일 원에 자그마치 소금이 열 포대나 배달되어 왔다. 그것도 국산 신안 왕소금으로. 건우아버님께서 보내셨다고 한다. 여하튼 놀라운 정성이며 마음이다. 밤사이 비라도 올새라 하늘도 살펴보았다.

“그래도 우리 애들은 참 행복한 애들이예요. 선생님이 계셔서” 우리 원장님으로부터 잊어버릴 때쯤이면 듣는 말이다. 과분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실은 늘 주거니 받거니 이다. 나도 늘 느끼는 바를 가감 없이 전한다. 이렇게 훌륭한 환경에 이렇게 제대로 된 먹거리, 이것이 우리 아이들의 진정한 복이라고. 나 스스로 좀 아끼겠다고 에어컨이니 보일러니 살뜰히 챙겨 최소한으로 쓸 새면 어느새 원장님께서 아낌없이 쓰시는, 그것도 변함없이 꾸준히 실천하시는, 그런 훌륭한 인품을 소유하신 분을 원장님으로 모신 것도 나 역시도 복이다. 참 많이 느끼고 돌아보기도 하며, 삶의 가치관이랄까 이제 내려놓고 볼 수 있는 여유마저 생긴 것 같다.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명장이 있는가하면 사람을 스스로 따르게 하는 덕장이신 원장님을 모시고 있어서 그런지 십 여분에 이르는 교사진들도 그야말로 날개 없는 천사들이다. 이분 저분 내킬 때면 우리 아이들이 또래 반 친구들 외식자랑에 상처 될까, 선물 자랑에 기죽을세라, 피자며, 통닭이며, 옷이며, 선물이며, 박봉에도 나눔을 실천하는 그 아름다움에 향기마저 난다. 지난주에는 두 달 전에 건강상 이유로 그만 두신 김선생님이 단감 한 박스를 들고 와 다녀가셨고, 어제는 그 이전에 허리디스크로 일을 그만두신 조선생님이 호두과자를 한 아름 안고 와 다녀가셨다. 다들 입을 모아 하시는 말씀이 이곳만큼 사람냄새 풀풀 나는 좋은 곳이 없다고들 하신다.

“선생님한테서 엄마냄새가 나요” 라는 일곱 살 민이, 건강상에 애로가 있으시긴 하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선생님이 알아서 다 잘해주시니까”라는 말씀으로 못내 아쉬움이 적지 않지만, 이 또한 내가 어쩔 도리는 없다. 그 어느 누구도 엄마를 대신할 수는 없지만, 채워 줄 수 있는 한 채워주려 애쓸 뿐이다.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언제나 엄마와 선생님을 동일선상에 놓는 아이, 나는 맘씨조차 고운 이 어여쁜 공주가 나의 셋째이며, 줄줄이 연년생으로 팔남매를 둔 다복한 엄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볼 때도 있다. 영겁의 인연이지 않을까? 이렇듯 오롯이 한방에서 먹고 자고 부대끼며 그들이 자라고, 내가 치유 받고. 힐링이 화두인 지금, 어느 게 먼저랄 것 없이 그들을 힐링해 주는 듯, 내가 그들로부터 힐링을 받은 듯,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고 작은 것에도 눈물 나게 감사함이 우러난다.


남편, 세월이 흘렀고, 시간이 약인 듯, 애써 외면하며 한 발치 떨어져서 보다보니 어느 결에 내 꽃 같은 청춘을 기억해 줄 유일한 그 사람이기에 애틋함도 느껴졌으며, 이십대에 만나 쉰의 문턱을 나란히 넘어가고 있는 것에 연민과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누구보다 우리의 공통분모인, 소중한 아들들이 평온함을 되찾은 것에도 감사할 따름이다.

“로봇 마~~니 마~~니 사주께요, 선생님,” 우리 막내 석이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드레스 만들어 드릴 거예요, 천사 날개 달아 서요. 선생님한테 만요,” 나의 큰딸 민이다.

이 아이들을 내게 주신 것을 천명으로 여기며, 이 일은 나의 소중한 천직이다. 앞으로도 이 일을 계속 할 수만 있다면, 십년 아니, 예순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손을 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또 다른 민이와 석이의 결핍을 채울 수만 있다면 말이다.

매스컴을 통해 심심찮게 접하는 흉흉한 사건 속에, 종종 결손가정으로부터 기인된 문제임을 지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것을 어찌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그들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너나 할 것 없이 금쪽같은 자식이다. 비단 내 자식을 금덩어리로 귀히 키운들, 세상이 온통 흉흉하다면, 이 얼마나 불안불안 하겠는가? 너무 쉽게 가족이 해체되고 있는 작금에, 언제든 그들과 접할 수 있는 것이, 일선에 있는 우리 보육교사들이다.

상처투성이일 수 있는 그 어린 영혼을 사랑으로, 정성으로 보듬어, 상흔 없이 고이 자라날 수 있도록, 튼튼한 뿌리가 되어 주리라 다짐해 본다. 이제 나는, 그들의 아픔이 나에게도, 내 아이에게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자각하고, 그들 개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문제이며, 우리 모두의 책임이며, 의무임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나의 말 한마디, 행동하나 조차도 되돌아보며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더불어 이처럼 막중한 일을 할 수 있는 보육인임에 자부심을 느낀다.

또한 숙제 하듯 시작된 이 글쓰기가 지난 이 년여를 되돌아보며, 나의 부족함에 진정 부끄러웠으며, 감동의 한마디 한마디는 곱씹어 느껴 보았고, 아픔은 눈물로 승화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육교사로서의 나아갈 바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으며, 진정한 참보육인으로 살기를 간절히 꿈꾼다. 그리고 갈망한다. 십년, 이십년 후, 예정된 나의 삶 가운데 언제라도 어디서라도 그들을 조우할 수 있는 날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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